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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의 역사

doso 2022. 3. 3. 03:23

1940~50년대의 일본은 세계 2차 대전에서 패배하며 엄청난 불황으로 나라가 많이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이때 혼자 소이치로는 1946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혼다 기술연구소를 설립한 후 2년 뒤 본격적으로 혼다

기연 공업이라는 회사를 창업하게 됩니다.

 

 

 

사업 초반부 혼다는 자전거에 엔진을 장착해 바이크를 만들어서 판매하다가 일본 산길을 잘 오를 수 있는

Dream 4E와 참신한 디자인의 JUNO를 만들어 시장에 내놓지만 생각보다 잘 팔리지 않았고 오히려 판매된 것

마저도 계속된 불량으로 고객들의 클레임이 쏟아져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상황이 여유롭지 못해 도산 직전까지

몰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장 혼다 소이치로는 전혀 회사의 경영상태를 신경 쓰지 않고 공돌이 출신답게 새로운 기술개발에만 

몰두하였습니다. 그 후 혼다 소이치로는 직원들이 일하던 작업장에 가서 귤 박스에 올라 세계 최고의 바이크

대회를 제패해서 일본인들에게 꿈을 안겨주자 라고 전 직원에게 말하며 레이싱용 바이크 생산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1957년 혼다는 자신들의 바이크를 검증하기 위해서 12개의 바이크 제조사가 참가하는 일본의 아사마 레이스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1~3위까지 야마하 바이크가 독차지하며 세계 제패는커녕 자국이었던 일본에서부터 벽을 느끼게 됩니다.

 

 

그 이후 혼다의 직원들은 연구실에서 밤낮 구분 없이 일하며 맨섬에서 3회나 우승을 차지했던 이탈리아의 몬디알을 분해해서 연구를 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엔진은 그 엔진의 마력에 절반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 망연자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 칼리나 국제 바이크 레이스가 미국에서 개최되었는데 경쟁사였던 야마하가 6위를 차지했고, 혼다 소이치로는 또다시 한번 귤 박스에 올라가 "우리는 바이크의 올림픽 맨섬에 참가해 우승을 할 것이다!"라고 연설을 합니다.

 

 

 

맨섬 레이스에 대해 간단히 설명 드리자면 섬에서 열리는 대회로 섬 한 바퀴의 거리는 60km에 코너는 219개가 있고 

고저차는 무려 400m나 됩니다. 게다가 서킷을 달리는 것이 아닌 일반 공도를 달리는 대회다 보니 노면도 고르지 못하죠.

혹시라도 드라이버가 실수해서 사고가 나게 된다면 배리어가 아닌 그냥 집이나 벽에 박는 형식이라 매년 대회마다 

사망자가 나올 정도로 악명이 높은 바이크 대회입니다.

 

 

 

혼다 소이치로가 맨섬 대회에 참가하기로 선언했을 때의 1959년 당시 맨섬 레이스가 시작되기까지는 10개월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고 혼다는 그때부터 엔진 제작에 더욱더 몰두하기 시작합니다. 마력과 출력 모두 타 제조사에 비해 많이 부족한 혼다 엔진이었지만 혼다는 긴 연구 끝에 2 밸브가 아닌 4 밸브 형식에 캠 축을 두 개 사용하는 DOHC 엔진으로 

생산하게 됩니다. 이 방식은 힘이 좋긴 하지만 설계가 복잡해 그 당시 많이 사용되진 않았던 방식입니다.

하지만 혼다는 최선책으로 이 엔진에 모든 것을 걸게 됩니다.

 

 

 

그렇게 완주하기도 힘든 맨섬 레이스에서 6위를 차지하며 순위권에 들게됩니다. 그리고 대회 3년 차였던 1961년에는

맨섬 레이스에 출전하기 전 최종 시범 무대인 독일 그랑프리에서 갑작스런 엔진 오버히트로 인해 바이크에 불이 나게 되며 리타이어를 하게 됩니다. 그 이후 혼다의 바이크는 219개가 되는 코너에서도 안정적인 주행이 가능하도록 서스펜션을 더욱 강화했고 엔진도 연구 끝에 마력을 끌어올리며 최고속도 180km의 바이크를 선보이게 되었죠.

 

 

 

1961년 맨섬 레이스 125cc부문 결승전에서 혼다는 이태리의 두카티와 독일의 MZ를 제치고 1위를 거두게 됩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은 1~5위까지 모두 혼다가 차지했다는 점입니다. 그 이후 전 세계 곳곳으로 혼다 바이크가 수출이 되며 회사가 안정을 찾게 되었고 부족한 기술로 인해 경영위기가 찾아왔었지만 반대로 자신들의 기술력으로 이 문제를 극복하게 된 것이죠.

 

 

 

바이크로 세계를 재패한 후 혼다 소이치로는 자신의 꿈이었던 자동차를 만들기로 결심하지만 당시 일본 정부가 수입차는 수입 자유화에 따른 특진 법을 내며 일본에서는 3개의 자동차 제조사만을 두기로 합니다. 이 당시 도요타, 닛산 등 

일본 내에서만 자동차 제조사가 7개나 되었기 때문에 자동차를 한 대도 만들었던 적이 없던 혼다는 절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때, 혼다 소이치로는 맨섬 경기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이탈리아에서 봤었던 F1을 갑자기 떠올리게 되는데 

바이크 경주의 정점인 맨섬 레이스를 통해서 회사의 위기를 극복했듯이 이번엔 자동차 대회에서 최고봉인 F1을 통해서 

자신들도 자동차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1964년 처음으로 F1 엔진을 만들게 되었는데요. 당시 8기 통 엔진을 사용하던 페라리보다 10%나 높은 200마력의 엔진을 만들게 되었고 이 엔진은 다른 팀에 비해서 1.5배나 컸으며 무게도 56kg나 더 나갔죠. 그 후 엔진을 얹을만한

차체를 제작해야 했는데 로터스에 의뢰하지만 로터스는 거절하게 되고 그렇게 혼다는 차체와 엔진 모두 직접 제작하게 됩니다. 그 이후 고질적인 엔진의 문제와 고집으로 F1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우연히 바이크 대회를 관람하게 되는데 여기서 자신들의 엔진의 문제점을 깨닫게 되고 점점 성공하게 되며 지금의 혼다로 자리 잡게 됩니다.